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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의 시대가 끝난 뒤: 징병제의 수학

알짜 노트 2025. 12. 31. 16:36

군대 얘기는 대개 감정부터 달아오릅니다.
어떤 술자리에서는 “복무기간만 늘리면 끝”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맞은편에서는 “요즘은 드론 시대라 사람이 필요 없지 않냐”는 말이 바로 이어집니다.

둘 다 그럴듯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 잘 안 나온다는 데 있습니다.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에서 안보는, 결국 무엇을 늘리고,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바꾸는지를 결정하는 설계 문제로 귀결됩니다.


징병제 수학

오늘 글의 결론(스포일러)#

징병제를 “유지/폐지”로만 두면, 토론이 늘 같은 곳에서 막힙니다.
인구 감소 시대의 국방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희소한 자원(젊은 사람의 시간과 집중력) 을 어디에 배치할지의 문제입니다.

이 글은 징병제를 이렇게 정의해보고 싶습니다.

징병제는 ‘병력 충원’ 제도이기 전에, 국가가 청년의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지 결정하는 거대한 인력정책 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선택지는 깔끔하게 네 갈래로 갈립니다.

  1. 더 오래/더 많이 뽑는다(병력으로 버틴다)
  2. 해야 할 일을 줄인다(임무·전장 개념을 바꾼다)
  3. 자본으로 대체한다(드론·무인·감시·정밀타격, 즉 기술로 메운다)
  4. 밖에서 가져온다(동맹·연합·외주화, 즉 관계로 메운다)

물론 현실은 네 칸으로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2)와 3)은 거의 늘 같이 움직이고, 1)을 택하면 5) 같은 ‘대우 문제’가 바로 따라옵니다.

정답은 “이 중 하나”가 아니라, 네 개를 어떤 비율로 섞느냐입니다.


 

징병제의 ‘수학’: 결국은 유량(Flow) 문제다#

징병제는 흔히 ‘머릿수’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흐름(유량)에 가깝습니다.

한국의 병역 의무는 법적으로 징병제를 뼈대로 돌아갑니다.1

아주 단순화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 한 해에 들어올 수 있는 인원(입대 가능 연령대 규모)
  • × 복무기간(머무는 시간)
  • ≈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상시 병력(대략적인 규모)

여기서 핵심은 이겁니다.

입대 가능 인원이 줄면, 같은 상시 병력을 유지하려면
복무기간을 늘리거나, 혹은 대체 인력을 다른 곳에서 끌어오거나(부사관·장교·여군 확대 등), 아니면 상시 병력 자체를 줄이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23

이걸 “청년층 부담의 나눗셈”으로 바꿔 말하면 더 노골적입니다.

  • 해야 할 일은 크게 줄지 않는데(경계, 정보, 훈련, 유지보수, 사이버, 재난대응까지)
  • 나눌 사람이 줄어든다
  • 그러면 1인당 부담(시간·위험·기회비용)이 커진다

그래서 징병제 논쟁이 어느 순간부터 “안보”보다 “불공정”으로 타는 건, 사실 자연스러운 경로입니다.
수학적으로 ‘나눌 사람이 줄어드는데 같은 몫을 요구’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불공정을 감지하거든요.4


병력으로 버티는 선택의 진짜 비용#

“그럼 더 뽑자/더 오래 복무하자”는 선택은 직관적입니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가장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비용이 숨겨져 있습니다.

경제적 비용: ‘국방비’가 아니라 ‘기회비용’이 커진다#

복무기간을 늘리면 국가 예산도 늘지만, 동시에 개인의 학업·경력·소득이 늦춰집니다.
이건 통계표에 깔끔하게 찍히지 않는 종류의 비용입니다. 그래서 더 잘 싸웁니다.

심리적 비용: 공정성은 숫자보다 ‘설명 가능성’에 민감하다#

사람이 받아들이는 공정성은 단순히 “모두 똑같이”가 아닙니다.

  • 왜 자신이 여기 있어야 하는지(필요성)
  • 이 시스템이 나를 존중하는지(대우)
  • 불합리한 낭비가 줄어들고 있는지(개선)

이 세 가지가 납득되면, 고통이 있어도 버팁니다.
반대로 하나라도 무너지면, 같은 제도라도 “착취”처럼 느껴지기 시작합니다.4

그래서 병력 중심으로 가려면, 숫자를 늘리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병력을 늘리기 전에, 낭비를 줄였는가?

경계·행정·잡무·인력낭비·불필요한 대기가 구조적으로 남아 있으면, 복무기간 연장은 그냥 “시간을 더 뜯어가는” 정책으로 인식됩니다.


 

기술로 메우는 선택의 환상과 현실#

드론, 무인화, 감시체계, 정밀타격… 이 카드는 매력적입니다.
특히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에겐 더 그렇죠. 하지만 기술은 ‘병력 대체’라기보다 병력의 성격을 바꾸는 도구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한국도 “무인·AI로 인력 부족을 메우겠다”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강조해왔습니다.5 다만 메시지가 강할수록, 그 다음 질문이 더 중요해집니다. “그럼 어떤 일을 사람에게 남길 건가?”

환상: “드론이 병사를 대체한다”#

기술로 메우는 선택의 환상과 현실

현실에선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 드론이 늘면 운용 인력(조종·정비·분석)이 늘어납니다
  • 정밀체계가 늘면 데이터·통신·전력·보급이 더 중요해집니다
  • 무인화가 늘면 오히려 전자전/해킹/재밍이 치명적 변수가 됩니다

즉, 사람 수요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사람을 더 필요로 합니다.56

이 글에서 보기엔 기술 전환의 진짜 병목은 여기입니다.

하드웨어가 아니라 훈련·운용·정비·교리(Doctrine)의 전환 속도.

드론을 사는 건 예산이면 됩니다.
하지만 드론을 “전장에서 이기게 하는 방식으로” 쓰는 건 조직학입니다.6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론과 전자전이 전장 구조를 빠르게 바꿔왔다는 분석이 반복되는 것도, 결국 같은 이야기입니다. 장비는 ‘있다/없다’로 끝나지 않고, 운용 방식과 보급·정비 체계를 함께 끌고 갑니다.6

그래서 기술 중심 전략을 택하면, 같이 따라오는 질문이 반드시 있습니다.

  • 숙련 인력을 어떻게 키울 건가(복무기간/교육체계)
  • 전시 지속력을 어떻게 확보할 건가(부품·정비·국산화·동원)
  • 네트워크가 무너져도 싸울 수 있나(분산·저가·아날로그 백업)

기술은 ‘병력 부족의 만능키’가 아니라, 병력의 시간을 고급 작업에 쓰게 만들어주는 도구라는 쪽이 더 정확합니다.


동맹으로 메우는 선택의 솔직한 대가#

동맹은 현실입니다. 외면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맹을 “공짜 안전”처럼 말하면, 바로 신뢰가 깨집니다.

동맹의 대가는 보통 세 가지 형태로 옵니다.

  • 자율성의 일부 포기(결정권이 100% 우리 손에 있지 않다)
  • 상호 의존의 고정비(연합훈련, 표준화, 역할분담)
  • 정치적 리스크(상대국 내 정치 변화가 우리 안보 변수로 들어온다)

이걸 인정해야 대화가 성숙해집니다.
동맹은 “의존”이 아니라 “분업”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분업”이 “의존”으로 굳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동맹을 선택지로 올려놓을 때는, 이런 방식이 좋아 보입니다.

  • 어떤 임무는 동맹과 강하게 묶고(예: 정보·감시·정밀타격 연계)
  • 어떤 임무는 자율성을 높이고(예: 동원·후방·재난·사회복원력)
  • 어떤 영역은 ‘동맹이 있어도’ 스스로 버티게 만든다(예: 지휘통제 마비 대비)

핵심은 “동맹이 있으니 줄이자”가 아니라, 동맹이 있으니 우리는 무엇에 집중할 수 있는가 쪽입니다.


이 글의 핵심 주장: 복무체계는 ‘병영’이 아니라 ‘서비스 디자인’이다#

여기부터는 ‘의견’에 가깝습니다.

징병제 개편을 이야기할 때 토론이 너무 빨리 “기간(몇 개월)”로만 들어가면, 중요한 질문이 하나 빠집니다.

국가가 청년에게서 가져가는 건 시간이 아니라 집중력이다.

20대 초반의 집중력은, 어떤 의미에서는 국가가 가진 가장 값비싼 자원입니다.
그걸 “경계 근무”와 “대기”에 쓰면, 사회는 두 번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복무체계를 “병영 제도”가 아니라 국가가 운영하는 거대한 인력 서비스로 보는 편이 생산적입니다. 서비스라면 당연히 이런 것들을 따져야 합니다.

  • 입력(선발): 누가, 어떤 기준으로 들어오는가
  • 처리(교육/배치): 그 시간에 무엇을 배우고, 어떤 일을 하는가
  • 출력(전역): 사회로 돌아갈 때 무엇을 들고 나오는가(자격·경험·네트워크)
  • 피드백(개선): 낭비가 실제로 줄어들고 있는가(지표·감사·공개)

이 관점에서 “현실적인 개편”은 대략 이렇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제안) 3층 구조로 재설계하기#

  1. 작은 상비 핵심(프로 코어): 지휘·정예·즉응·고난도 운용은 직업군 중심으로
  2. 기술/운용 중심 징집(스페셜 트랙): 드론·정비·통신·사이버·의무·후송처럼 ‘교육하면 가치가 커지는’ 분야로
  3. 두꺼운 예비·동원(짧고 자주, 실전형): 길게 한 번이 아니라, 짧게 여러 번(사회와 끊기지 않게)

이 구조의 장점은 “병력 부족”을 정면으로 해결한다기보다, 같은 인원으로 ‘더 쓸모 있게’ 만드는 방향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심리적으로도 이득이 있습니다.

  • “군대에서 뭘 배웠냐”에 답이 생기고
  • “자기 시간이 낭비됐다”는 감정이 줄고
  • ‘공정성’이 기간 경쟁이 아니라 역할·성과로 이동합니다

물론 당연히 단점도 있습니다.

  • 교육·훈련을 진짜로 해야 해서 돈이 더 듭니다
  • 숙련도 관리가 어렵고, 지휘체계가 복잡해집니다
  • 군이 “사람을 갈아 넣어 돌리는” 방식으로는 못 돌아갑니다

하지만 이 단점들은 오히려 “인구 감소 시대엔 피할 수 없는 비용”에 가깝습니다.
청년이 줄어드는 사회에서, 싸게 굴리는 시스템은 오래 못 갑니다.


“현실적 트레이드오프”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결국 논쟁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 병력을 늘리면: 시간(청년)을 더 쓰는 대신 돈(기술/인건비)을 덜 쓴다
  • 기술로 메우면: 돈(장비·교육·정비)을 더 쓰는 대신 시간(청년)을 덜 쓴다
  • 동맹을 키우면: 자율성(결정권) 일부를 내주는 대신 부담(자체 확보 비용)을 덜 쓴다
  • 임무를 줄이면: 정치적/심리적 비용(불안)을 감수하는 대신 현실의 부담을 줄인다

이 글은 이걸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가치 판단이지만, 적어도 무엇을 지불하고 있는지는 솔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징병제 논쟁에서 자주 빠지는 질문 3개#

1) ‘숫자’가 아니라 ‘임무’부터 정리했나?#

무엇을 지킬 건지, 어디까지를 국방의 범위로 볼 건지(재난, 사이버, 회복탄력성)부터 합의하지 않으면, 병력 논쟁은 늘 “많아야 한다/적어도 된다”의 끝없는 감정싸움이 됩니다.

2) 병력은 있는데 ‘운용’이 안 되는 순간을 상상해봤나?#

전쟁은 평소의 조직도를 그대로 유지해주지 않습니다.
통신, 전력, 지휘통제가 흔들릴 때 버티는 힘은 “명목 병력”이 아니라 숙련된 분산 운용 후방의 지속력입니다.

3) 공정성의 핵심이 ‘기간’인지 ‘존중’인지 구분했나?#

복무기간을 몇 개월로 맞추는 건 상징적으로 중요하지만,
사람이 체감하는 공정성은 결국 낭비가 줄고, 대우가 좋아지고,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결론: 인구가 줄어들수록, 징병제는 더 ‘정교’해져야 한다#

인구 감소는 징병제를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반대로 징병제를 더 똑똑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건 낙관이 아니라 강제된 현실에 가깝습니다.

앞으로 징병제 논쟁이 이렇게 바뀌었으면 합니다.

  • “징병제 유지냐 폐지냐”가 아니라
  • “청년의 시간을 어디에 쓰고, 어떤 능력으로 되돌려 줄 거냐”로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결국 국방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청년을 대하는 방식 전체(교육·노동·주거·복지)와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우리는 안보를 ‘인구’로 계산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27
그래서 더더욱, 안보를 ‘사람’으로 대해야 합니다.


독자에게 남기는 질문 2개#

  1. “병력 부족”을 이야기하기 전에, 한국 사회는 군이 맡아야 하는 임무의 범위(전쟁·회복탄력성·재난·사이버)를 먼저 합의하고 있는가?
  2. 징병제를 유지한다면, 사회는 청년에게서 가져간 집중력만큼을 어떤 능력·경험·대우로 되돌려주고 있는가?

참고#


  1. 국가법령정보센터, “병역법”. https://www.law.go.kr/LSW/lsInfoP.do?lsiSeq=6160&efYd=20250521 ↩︎
  2. United Nations, 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 Population Division, World Population Prospects 2024 (download page). https://population.un.org/wpp/Download/ ↩︎ ↩︎
  3. KOSIS(통계청), “합계출산율(시도/시/군/구)”.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B81A21&conn_path=I2 ↩︎
  4. Tom R. Tyler, Why People Obey the Law (2nd e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6. (Procedural justice & legitimacy) ↩︎ ↩︎
  5. Reuters, “South Korea showcases unmanned, AI military tech to compensate for aging population”, 2025-10-17. https://www.reuters.com/world/asia-pacific/south-korea-showcases-unmanned-ai-military-tech-compensate-aging-population-2025-10-17/ ↩︎ ↩︎
  6. Jack Watling, Nick Reynolds, Tactical Developments During the Third Year of the Russo-Ukrainian War, RUSI (Royal United Services Institute), 2025-02-11. https://static.rusi.org/359-SR-Tactical-Developments-Third-Year-Russo-Ukrainian-War-web-final.pdf ↩︎ ↩︎ ↩︎
  7. Reuters, “S. Korea’s military shrinks 20% over 6 years as young male population drops”, 2025-08-10. https://www.reuters.com/world/asia-pacific/s-koreas-military-shrinks-20-over-6-years-as-young-male-population-drops-2025-08-10/ ↩︎